Being move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존재하는 만물은 무엇인가.
어떻게 이런 것이 존재하게 되는가.'
쉬운 듯, 어려운 듯, 아무 생각 없는 듯한 모습으로 이 문구를 들어봤을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근래 이후,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어느 날 자연의 어느 곳에 여러분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아무도 없다. 그리고, 육식인지 채식인지 스스로도 모르는동물 한 놈이 주변에 나타났다고 합시다. 전제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며, 동물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서로 만났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스스로 먹고 마시는 것 자체도 모르고 도대체 아무런 지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로서 사람과 동물이, 잘 조성된 자연의 환경에 서로 만났습니다. 물론, 그간에 배가 고픔을 비롯 기본 욕구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는 제외합니다.
그들은 각각 쳐다보다가 자신의 행동을 하다가 이곳 저곳을 움직이다가, 가까이 살피는 듯, 탐색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배운 것이라기 보다 내재한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가가 약간의 자극을 주기도 만지기도 하다 친구가 되어 즐겁기도, 뒹굴다가 상처를 내기도, 화를 내기도 합니다. 배운 것은 없습니다. 내재해 있는 능력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다 지치고, 싫증나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닙니다. 배가 고픕니다. 내재한 욕구가 드러납니다. 나무와 바닥, 물 등에 무언가 있는데, 가만히 있는 열매들이 쉽게 잡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맛봅니다. 달거나 쓰거나 역겹거나 좋거나 경험합니다. 씹어보기도, 꿀떡 삼키기도 해봅니다. 토하기도, 정말 맛있기도 합니다. 민첩해 어떤 생물을 경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내재해 있는 능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 동물과 사람이 다시 만납니다. 또 엇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예상해볼 수 있듯, 그러다 잘못하면 힘의 여부로 인해 큰 상처를 낼 수도 있으며, 관계는 굉장히 나빠질 수 있고, 삶과 죽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힘과 두뇌 능력이 좋은 쪽이 우세할 것입니다. 힘은 동물이 좋다는 가정하에, 두뇌는 사람이 좋다는 가정하에, 그 관계 가운데 결국 가능성은 나뉘게 될 것 입니다.
동물이 사람을 해친다. 사람이 동물을 해친다. 어느 쪽이든 도망가 관계의 엮임이 없어진다. 둘이 잘 지낸다 등의 어느 쪽이 되든 그런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여기에 변수로 더 많은 존재들이 등장한다면, 좀 더 복잡한 모습이 펼쳐집니다.   

태초의 그 장소에 사람 둘이 등장해도 그에 비슷한 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후, 사람 남자 아담을 만드시고, 그로부터 사람 여자 이브를 만드신 후의 성경의 역사 기록은 충분히, 많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의 경우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좋습니다. 이 내용과 관련된 논쟁을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하는가.
삶은 이미 안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해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모습에 대하여 알려주신 가르침은 2000여년에 이르렀으며', 모르는 사람도 있거니와 아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어디를 향하는가.

앞서의 간략한 소개의 예시와 같이, 존재하는 모습은 나름의 흐름을 타고, 얘기가 전개되어 역사, 연대기의 내용이 됩니다.
관점을 넓혀 지구 공동체라는 존재를 놓고, 어디를 향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구체화하기에는 복잡한 관계성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보이는 실체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구 공동체, 태양계는 과연, 넓디 넓고 광활한 공간의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알 필요 없으며, 알 수 없는 것인가의 의문은, 앞서의 소개한 모습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게 합니다.
공간의 어딘가를 점유하고 있는 지구의 상태는, 지구 내의 한 생물이 어디에 거함을 스스로 알 수 없듯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각 대륙이 있음과 그곳으로 인류가 흩어져 들어가 삶을 살아가며, 부여 받은 소명에 따르든, 모르고 살아가든, 인생이 그렇게 흘러 오늘에 이름을 보고 있듯, 그것에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내든, 의미를 부여하고, 찾아가든 삶의 여러 모습을 지니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지구 공동체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으며, 누군가는 무관심해도,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모습이 존재할 것입니다. 지구 내의 역사를 통해, 지구 밖의 흐름을 가늠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구 공동체와 주변 태양계는, 우주라는 공간을 점유하며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자각은, 삶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게 합니다. 이를 궁금해하였던 과거 이래 오늘의 모습들이 존재하고, 나름의 정도에 이를 것입니다.

being move

예를 들면, 어느 때엔가 무언가에 빠져 깨어보니 여기가 어댜 하며, 자각하는 것과는 같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바다에 놓인 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문득 깨어보니 바다 한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배위에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무감각한 모습이 점차 내재한 능력에 입어, 정신을 차리고 목적을 알고, 방법을 찾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에 대한 지식을 얻어 행하는 것과 같이, 지구 공동체와 태양계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각자에게는 삶이 있고, 가정이 있고, 돌봐야 할 모습이 존재하며, 좀 더 넓은 관점을 보유해야 하는 누군가는 스스로는 알 수 없음의 한계에 직면하여, 전능하신 창조주에 힘입어 한 발짝 나아갈 길을 알게 된 성경의 역사 기록을 통해 발견하듯, 이 시대에 합당한 방향을 알려 주심의 믿음을 요한다고 하겠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바다 위에 떠있는 배의 인생이 어디로 가고 싶겠는가. 바다 외의 무엇이 존재한다는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삶은, 그에 기반하여 무언가를 바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기반이 없다면, 바랄 것 자체를 발견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뭇 하늘의 별들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네 자손이 그와 같이 창대 할 것이라는 창세기' 의 오랜 과거의 말씀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듯, 지구 공동체는 단지 그 체적에 준하는 채워져야 할 생명체의 의미로 채워진다는 것 자체이겠는가.
인류는 그 모습의 결과로, 지구 공동체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공간이 좁다고 여겨지면, 더 넓은 곳이 있는지에 따른 모습을 지닙니다. 이전에 보였던, 선구자적 모험과 뒤따른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듯, 오늘날의 시대에 합당한 시도들을 하고 있음을 압니다. 우주로 무언가를 내보내고, 탐색하고, 컴퓨터의 등장과 발달 등은 이러한 시도들입니다. 그렇게 하여, 먼 훗날 언제가, 유럽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고, 여러 대륙으로 이주하는 모습의 등장과 같이 예견해 볼 수 있음을 압니다. 저 먼 어딘가 살 곳을 발견하고, 거하게 될 수 있음의 예견은 시대적으로 합당한 가능성의 탐색이 될 수 있습니다. 인류는 그를 위해 발전시켜야 할 여러 모습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 단계 단계의 구간은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 삶의 인생이 좀더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모습의 가능성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영역, 형의 상학, 관념적으로 삶을 어떻게 살며, 지금 어떻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음은 중요한 실제입니다. 그와 함께, 존재하는 호기심 많은 인생에 의해, 감각적 관찰에 의존하는 삶의 모습도 존중 받아야 함도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관계 가운데,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지구 공동체는 어떻게 그곳에 닿을 수 있을까.
도구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이르게 합니다. 배와 기차, 자동차, 비행기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지구도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도구입니다.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고, 가꾸고, 다룸에 따라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어떤 모습으로 갈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Ma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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